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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조 정전공부 : 내 행위에 신념을 가졌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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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인문학연구소2023-10-15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주의·조행
이번 호에서 함께 공부할 ‘주의·조행’은 정기훈련 11과목 가운데 마지막 과목으로 취사력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작업취사’ 훈련 과목이다. 사전적으로 주의란 ‘마음에 새겨 두고 조심함’을 의미한다. 조행이란 ‘태도와 행실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정의되는데, <정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다. ‘경우에 따라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실행하는 마음’이 주의(注意, heedfulness)요, ‘그 실행하는 마음이 구체적인 행실 가짐으로 나타나는 것’이 조행(操行, deportment)이다. 주의와 조행 모두, 일상에서의 실제 실행을 강조하는 공부, 훈련 과목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 호에서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유무념 공부와 관련지어 ‘주의·조행’을 들여다본다면 그 핵심 의미를 좀 더 명료히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주의는 사람의 육근을 동작할 때에 하기로 한 일과 안 하기로 한 일을 경우에 따라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실행하는 마음을 이름이요, 조행은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행실 가짐을 이름이니, 이는 다 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를 무시로 대조하여 실행에 옮김으로써 공부의 실효과를 얻게 하기 위함이니라. 소태산 대종사는 유무념 공부를 할 때에, 처음에는 일이 잘 되었든 못 되었든 ‘취사하는 주의심’을 놓고 안 놓은 것으로 번수를 계산하고, 공부가 깊어 가면 ‘일이 잘되고 못된 것’으로 그 번수를 계산하라 하시었다. 따라서 이러한 두 단계의 공부법은 주의와 조행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즉 유무념 공부를 할 때에 ①초보 단계에서는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실행하려는 마음을 챙기는 ‘주의 공부’에 우선 주안점을 두고, ②심화 단계에서는 일의 결과가 원만하게 나와지는 것까지를 챙기고 대조하는 ‘조행 공부’에 주안점을 두어 깊이를 더해 갈 수 있다. 물론 이는 방편상 두 단계로 설명한 것일 뿐, ‘주의 공부’와 ‘조행 공부’에 선·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실천하려 주의하고 그 주의하려는 마음에 우선 초점을 맞추어 공부하는 게 공부심을 진작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로, 공부를 해 나아가는 데 있어 사람다운 행실 가짐 또는 올바른 결과에만 먼저 초점을 두게 되면 공부가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질 수 있음을 짚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원불교에서는 유무념 공부를 비롯한 상시일기, 주의, 조행과 같은 실천적 공부법을 아주 많이 강조한다.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 데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에 돌아가고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대산 종사께서도 일찍이 ‘실천의 가뭄’을 지적하시면서, 이 가뭄이 들면 세상에 거짓이 가득 차 서로 속이려고만 하므로, 삿된 길로 가거나 죄의 구렁에 빠져서 금수 같은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나니, 이를 해소하려면 상시일기·주의·조행 등으로 정의는 죽기로써 취하고 불의는 죽기로써 버리는 실행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런데 사실, 주의와 조행이 무슨 의미이며 어떻게 하는 공부법인지를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경전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유념의 마음이 ‘주의 공부’이며, 비단 <예전> 뿐만 아니라 경전의 말씀 모두가 우리를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조행 공부’ 길이라, 오히려 지침은 차고 넘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능동적으로’ 주의, 조행을 실천해 나아가게 하는, 내 행위들을 관통하고 있는 ‘큰 줄기’가 있느냐의 여부, 그것이 관건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의 ‘큰 줄기’란 바로 신념으로 바꾸어 말해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믿음, 신념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 삶의 태도, 나의 언어와 행위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를 존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께서는 자신의 삶, 나의 업의 행위를 이끄는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시는가? 필자의 경우에는 ‘인과의 이치’에 대한 신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경우 경우가 인과의 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그것에 기준을 두게 되면, 비록 아직은 전생 습으로 인해 부족하고 미진할지라도, 나의 몸과 마음을 챙기고 또 챙기는 ‘주의 공부’와 사람다운 행실 가짐의 ‘조행 공부’를 아니 할 수가 없게 됨을 날마다 확인하곤 한다. 내가 이것 밖에 안 된다고 낙망하여 오랫동안 의기소침할 것도 없고, 내가 좀 괜찮은 자리에 있다 하여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 하여 함부로 또는 경외심을 놓은 채 누군가를 대할 일도 아님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 특히,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른 점으로 ‘언어 사용’을 꼽을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러한 측면에서 ‘사람다운 행실 가짐’을 챙겨 봐도 좋을 것 같다. 비록 누군가를 때리고 죽이는 금수만도 못한 행위를 실제로는 안할지라도, 우리는 입으로 내뱉는 언어들을 통해 너무나 쉽게, 혹은 무심코 누군가를 죽이고 욕보이며 가슴 아프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요 근래의 나의 언어들은 얼마나 사람다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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