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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조 정전공부3: 일상수행의 요법 4조
마음대조 정전공부3: 일상수행의 요법 4조
마음인문학연구소2022-08-01

일상수행의 요법 4조

글. 김일원  교무·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일상에서의 마음공부’는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로써,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그 요란함, 그 어리석음, 그 그름을 순발력 있게 알아차리고 삶 속에서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려 노력하는 것이 그 기본이며 핵심이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 마음공부가 잘 되는 날이 있는데 어느 날은 잘 안될 때가 있다. 비록 취사까지 잘 되지는 못했을지라도 내 마음을 알아차리려 열심히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날이 있는가 하면, 그냥 아무 것도 하기가 싫을 때도 있고 마음을 그냥 놓아버리고 살게 되는 때도 있다. 주로 어떤 때 마음공부가 잘 되고 어떤 때 마음공부가 안 되는 것일까?

일상수행의 요법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우리가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잘 알고 있듯이, 우리의 마음 상태에 답이 있다. 바른 것에 대한 믿음이 일어날 때(신, 信), 정진하고자 하는 용맹스런 분발심이 일어날 때(분, 忿), ‘그 까닭이 뭐지?’ 하며 궁구하고자 하는 질문을 가질 때(의, 疑), 이러한 공부에 대해 정성스런 마음이 일어날 때(성, 誠), 우리는 공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날들이었음을 쉽게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바른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에 확신이 서지지 않을 때(불신, 不信), 내 마음 한 구석에 과히 취하려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을 때(탐욕, 貪慾), ‘어우 귀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뭐’ 하는 나태한 마음이 일어날 때(나, 懶), 어둠에 가리어 내 마음대로 막 하고 싶은 어리석은 마음이 쑥 올라올 때(우, 愚), 어느새 마음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진 마음방치의 상태로 살게 됨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공부의 기본 방법인 ‘일상수행의 요법 1~3조’를 꾸준히 실천해 가는데 있어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일상의 마음공부’가 지속될 수 있도록 마음을 챙겨가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이 서면 불신이 자리할 틈이 없게 되고, 자꾸 ‘분발심’을 일으키게 되면 게을러지려는 마음을 챙길 수 있게 되며, 예컨대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돌아가지?’, ‘어떠한 연유로 이러한 결과가 생겼을까?’ 등의 ‘이 뭐꼬?’의 ‘의심’을 일으켜 자꾸 궁구하고 연마하려 하면 어리석음, 욕심이 점차 줄어들게 된다. 이것을 ‘정성’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는 공부가 별개로 필요하지 않다. 내 마음에 ‘신·분·의·성’을 챙기면 ‘불신·탐욕·나·우’는 저절로 제거된다.

그렇다면, ‘신·분·의·성’을 들이대는 것에 순서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정성으로 하다보니 의문이 더 생길 수도 있고 정성으로 하다보니 분발심이 더 생기고 믿음이 더 깊어질 수도 있다. 핵심은, 내 마음 안에 이것들을 자꾸 챙겨가는 것이다. 챙기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신·분·의·성’의 마음과 태도가 우러날 때까지 말이다. 이렇듯 ‘신·분·의·성’에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여기에서 ‘신(信)’만 조금 부연하여 강조를 할까 한다. 분(忿)과 의(疑)와 성(誠)은 ‘내가 조금 부족하구나’ 혹은 ‘내가 이 부분을 더욱 챙겨야겠구나’를 명확히 알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신(信)’에 대하여는 언행일치가 안되고 두리뭉실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원불교 교도라면 진리와 스승과 법과 회상에 대한 믿음이 탄탄하게 서 있는가를 묻고 싶고,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비교도, 비종교인이라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이치를 믿고 있는가 묻고 싶다.

편의상 후자의 질문을 가지고 설명을 더해 보려 한다. 아마도 대체적으로 많은 이들은 ‘이것을 믿는다’고 응답할 것이다. ‘콩을 심었으니까(원인) 콩이 열린다(결과)’는 것은 누구라도 참된 이치임을 수긍할 것이다. 이 세상이, 그 원인으로 인해 그 결과를 얻게 되는 인과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믿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이치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나의 심신작용을 이 믿음에 맞게 하고 있는가?

상황을 하나 떠올려 보자. 동료들과 여행을 하기 위해 기차역에 갔는데 화장실을 가고 싶어졌다. 큰 여행 가방을 들고 화장실을 갈 수가 없으니, 우리는 흔히 일행에게 가방을 맡기고서 볼 일을 보고 온다. 믿는다 안믿는다 할 것도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믿으니까 내 것을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믿지 못하면 가방을 맡기겠는가? 믿으니까 ‘맡길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신(信)’이다.

진리에 온통 맡기고 사는 삶, 내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업의 씨앗을 내가 언젠가는 받는다는 믿음 하에 하루하루를 걸어가는 삶, 그것이 바로 확실한 ‘믿음’이다.

☞ 일상수행의 요법 4조 실천 점검하기

※ 아마도 왼쪽, 오른쪽 둘의 경험을 많이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의 빈도가 더 높은지가 핵심입니다.

http://www.m-wonkwang.org/news/articleView.html?idxno=1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