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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신문-기고] 루돌프 오토와 『성스러움의 의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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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인문학연구소2015-12-05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루돌프 오토와 『성스러움의 의미』
– 이분법으로 가를 수 없는 ‘누미노제’의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
루돌프 오토와『성스러움의 의미』
독일의 종교 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 감정으로서의 ‘누미노제’에 천착하고, 이러한 관점으로 세계의 종교를 거시적으로 연구하였다. 1917년 출간된『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는 일차 세계대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보통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법한 일이 없는 종교철학 분야에서 한 권의 책이 가져온 성공의 문화사적 의미에 대해서 여러 가지 후속 연구들이 진행되었을 정도로 이 책의 폭발적인 인기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불가언적인 성스러움의 경험과 초월적인 신적 원리에 대해ㅆ서 설명하는 이 두껍지 않은 책이 어떻게 그러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전쟁 후 정신적 공허함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갈구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하나의 작용 요인이었을 것이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쟁에서 경험한 인간사와 세계의 모순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비합리적인 종교 체험이라는 것이 이론적이고 감정적인 설명체계로 작용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 저서는 출간 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영어, 불어, 일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지금까지 종교철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팔린 책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총 23장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 저서는 1917년 초판이 나온 후 계속적으로 관련된 논문들이 뒷부분에 추가되고 각주가 보충되면서 길어졌다.
『성스러움의 의미』는 1911년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얻은 영감으로 집필되었다. 오토는 지중해 주변 국가를 탐방하던 중 모로코의 한 도시에서 오래된 시나고그에 들어가고, 우연히 유대인들의 낯선 기도 소리를 듣게 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더럽고 어두침침한 이국의 장소에서 울려 퍼지는 낯선 언어에서 ‘성스럽다’는 단어를 감지하고 종교적 감정의 보편성 문제에 착수하게 되었다.
진리(眞), 선함(善), 아름다움(美)에 더하여 성스러움(聖)은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이다. 이 중에서 ‘성스러움’은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sui generis) 해석적 범주이다. 성스러움은 통상 선함과 연결되어 이해되지만, 성스러움의 윤리적인 속성은 시간을 거치면서 철학적이나 신학적인 단계에서 개념화되고 합리화된 것이지, 결코 근원적이거나 본질적인 의미는 아니다. ‘성스러움’을 뜻하는 고대의 언어들을 보면 그러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게르만, 라틴어, 아랍어 계열 등에서 지금의 ‘성스러움’으로 번역되고 있는 언어들은 원래 윤리적인 차원과는 다른 언어적 기원을 보여주며, ‘힘’, ‘금지’, ‘구분’ 등을 나타낸다.
종교라고 하면 보통 교리와 윤리적 차원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한 접근은 오히려 생생한 종교적인 경험을 화석화하고 교조화할 수 있으며, 종교적인 삶이 지닌 경험적 독특함을 드러내지 못한다. 성스러움의 경험적 독특성은 합리주의자들이나 신학자들이 교리적으로 정당화하거나 개념적으로 이해(begriffliche Erfassung)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시도로는 접근할 수 없는 불가언적(arreton)이며,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자류적인 영역이며, 철학이나 신학이 아닌 체험의 영역이다. 비합리적(irrational)이라는 것은, 이성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을 뜻한다. 인간의 이성을 압도하고 초월하는 감정으로서의 종교적 경험에 관한 이러한 접근은 우리에게 ‘성스러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청한다.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
종교사가들은 고대적인 신 관념의 기원을 ‘귀신’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종교적으로 경배한다’로 번역되는 산스크리트어 ‘aradh’의 원래적 의미는 ‘화해시키다’ ‘신의 노여움을 위로한다’ 정도였다. 귀신과 영계란 무엇인가? 물질세계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에게 낯설고 괴기스러운 대상과 그 대상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다. 성스러움에 대한 두려운 감정을 세속적인 영역으로 대입해 본다면, 흡사 우리가 공포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전율을 느끼도록 두려운 것, 그러한 공포 속에서도 끌리게 되어서 제 정신을 잃는 매혹의 감정은 원초적 종교성과 맞닿아 있다. 누미노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대상에 대한 ‘성스러운 전율’과 ‘종교적 공포’는 독일어 단어 ‘무시무시함(Grauen)’이나 영어 단어 ‘awe’에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감정을 느낄 때 인간은 자연적 공포와는 또 다른 신체적 반응을 나타내는데, “찬물을 끼얹듯 소름이 끼친다”거나 “등골이 오싹하다”는 표현이 종교적인 두려운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성스러움의 의미』, 52쪽)
누멘적인 두려운 감정들은 합리적으로 교리가 발전해 가면서 신학화되고 윤리적인 개념으로 바뀌기도 한다. 성스러움을 느끼게 되면 절대적인 대상 앞에서 두려운 위압성(tremenda majestas)을 느낀다. 그 압도적인 두려운 대상에 대한 대조로서 스스로는 왜소해지고 함몰되는 경험을 하면서 무화(無化)되는 것처럼 느낀다. 이것이 사실 종교적 ‘겸손’의 감정을 이루고 있는 누멘적 원료이다.
‘종교적 신비’의 또 다른 측면은 매혹이다. ‘매혹성(das Fascinans)’은 두려움과 더불어 성스러움의 다른 한 축을 설명한다. 그것은 경탄스러운 것(das Wundervolle)으로서 그 감정을 묘사한다면 “감각을 혼란케 하는 것과 더불어 감각을 홀리고, 빼앗아 가고, 이상하게 황홀케 하며, 도취와 흥분으로 격앙”(『성스러움의 의미』, 80-81쪽)시킨다. 누미노제의 매혹적인 요소는 압도적이고 위압적인 두려움(tremendum)과 대조를 이루면서 누미노제를 보충한다. 두려움과 매혹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의 신비는’어마어마함(Ungeheuer)’과 ‘장엄성(augustum)’으로 이어진다.
정리하자면 성스러움의 속성은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로 정의된다. 두려움과 매혹이라는 종교적인 감정이 점차적으로 합리적 표상과 개념들로 도식화되면서 자비, 사랑, 은총 같은 개념으로 ‘신학화’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초적·종교적 감정에 깃든 누멘적인 요소를 느낄 때 인간은 종교적인 감정의 진수를 맛보는 것이다.
‘누미노제’의 의미
고대의 신화나 전설들, 종교 경전들 속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문명적으로 요리되지 않은 날것’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안에서 우리가 종교적인 것에 기대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윤리적인 가르침- 보다 낯선 것, 음울하고 어두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직면한 ‘진실’을 무시하기는 상당히 불편하다. 한편으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 너머의 것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에 경외를 보내기도 한다.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물리적 세계와 경험 세계의 빈곤함은 우리의 상상력을 신화와 종교의 세계로 이끈다. 경험 세계 너머의 실재(reality)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인간의 의식은 그 실재를 만들어 내면서 현실 세계를 딛고 일어나거나 ‘초월’하여 이 세계를 상대화시킬 ‘다름’을 상상하게 한다. ‘성스럽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영역의 독특한 인식적, 해석적, 가치적 범주이다. 오토의 저작은 성스럽다고 할 때의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오토는 종교를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곡해하거나 교리적으로 해석하면, 종교의 살아 있는 체험을 ‘묽게’ 하고 그 생동감이 약화되며 지적으로 포착할 수 없음을 주목했다. 개념(Begriff)과 교리가 있기 전에 먼저 인간의 약동하는 경험이 있다. 어떤 순간의 말할 수 없는 기이함, 전율의 느낌, 숭고함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존의 자연적인 용어에서 차용하여 종교적인 용어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종교적 경험을 나타내는 의성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용어로 해석되기도 한다. 오토가 놓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언어로 표현되기 힘든 이러한 종교성의 본질적인 특징과 그 생생한 경험적 실재를 잡아내는 것이었다. 오토가 보여준 박진감 넘치는 종교적 세계의 탐구는 다양한 영역에 학문적 영향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현대 종교학의 거장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종교현상학과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의 심층심리학에 대한 학문적 전제로서 사용되고 있다. 누미노제는 종교 감정과 인간 심층 심리를 설명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 책의 메시지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과 신비주의에 대한 통찰은 인간의 종교성이 지닌 심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좋다/나쁘다’, ‘행복하다/불행하다’, ‘긍정적이다/부정적이다’, ‘선하다/악하다’와 같은 이분법적 수식들은 누미노제적인 경험에서 빛을 바랜다. 특히 모든 삶의 영역에서 지나치게 윤리적인 것으로 재단하거나 이분법적인 대립이 종교적 영역을 침투한 한국적인 현실(보수/진보, 우파/좌파, 열광적 개신교/’개독교’ 담론)에서 종교적인 경험이 가지는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탐구는 우리의 정신적 시야를 넓힌다. 현실 종교와 정치에서 ‘선’과 ‘악’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동시에 윤리적으로 사람들을 편 가르게 하고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문법으로 사용된다. ‘악의 축’,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성찰되지 않은 종교적 수사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숨막히게 한다. 정신세계와 세상의 다양성을 한 편으로 모는 것에서 한 발자국 나와서 인간 정신의 다면성과 거대함을 보여주는 종교적 고전이 필요하다.
최정화 교수(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ttp://www.wk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1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