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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매일신문-기고] 마음의 두 층위와 ‘탈에고(egoles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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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인문학연구소2015-05-07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마음의 두 층위와 ‘탈에고(egoless)’
2015년 05월 17일(일) 20:01 [(주)전라매일신문]
ⓒ (주)전라매일신문
마음의 활동은 두 층위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표층의 마음’과 ‘심층의 마음’, 혹은 본심(本心)과 망심(妄心)으로 명명할 수 있다. 표층의 마음은 감각의식, 사유, 판단, 및 자기의식(에고)을 포함한다. 표층적 마음은 각각의 개별적 마음에 따라 천차만별로 전개될 것이지만 마음의 심층에서 보면 오직 하나의 마음, 즉 본심을 갖고 있다.
우리의 심층에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를 그려내는 하나의 우주적 마음이 작용하기에 우리는 누구나 그 마음의 자각인 진심(眞心)이자 전일심(全一心)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인간 마음은 진여와 생멸, 혹은 청정한 마음(淸淨心)과 어두운 마음(無明心)의 두 층위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청정한 마음은 무명의 풍동(風動)에 의지해 현현한다.”
인간의 근원을 청정심으로만 보지 않고 염·정(染淨)의 일체로서 보는 것이 기신론의 특징인데, 인간 삶은 태생적으로 진·망(眞妄), 선·악(善惡), 염·정(淨染), 각과 불각(覺·不覺)을 수반한다. 인간은 우주 본체로서 일심을 가졌기에 무한한 긍정을 표할 수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인간은 무명을 순간, 순간 수반하기에 부정적 한계를 지닌다.
우리에게 어두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진여(眞如, 청정한 마음)가 무명에 의지해 움직여 ‘진망(眞妄)화합의 마음’이 되기 때문이고 다시 이 마음으로부터 미망의 세계가 생멸하기 때문이다. 이 미망의 세계를 생멸시키고 있는 어두운 마음을 ‘불각(不覺)’이라 하는데 이는 현대적 표현으로 ‘에고’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에고는 자신이 우주의 실재(the One World of Reality)임을 자각하지 못한 마음이다. 우주와 하나인 ‘큰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진여와 상응하지 않아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고 이를 이름 하여 무명이라 하는 것이다. 즉 우주의 근본생명인 진여 자체가 평등한 우주 한 몸으로서 만물이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가 에고이다.
에고는 무지(無智)로 인하여 차별적인 세계로 점차 물들여지고 망심(妄心)으로 경계를 짓는다. 그 과정을 세분화하면 ①대상에의 좋음과 싫어함의 분별 ②분별에 의한 고락의 생김 ③좋고 싫어함의 상속 ④상속에 의한 대상에의 집착 ⑤집착한 느낌을 실제로 여기고, 이름을 붙여 분별하며 애증의 번뇌를 발현 ⑥번뇌를 일으킨 결과 스스로 자신을 속박해 가고 망상을 진실된 것이라고 굳게 믿음이다.
그리고 이를 자기와 동일시하여 나(에고)를 형성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에고를 뜻하는 아함카라(Ahamkara)의 원래 뜻은 ‘꾸며낸 나’, 또는 ‘나 자신을 만들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에고는 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에고에 의해 초래된 무지와 집착은 영적, 정신적, 신체적 장애들의 주요 원인이 된다. 에고는 언제나 외부 인상을 마음속으로 가지고 와서 우리가 그것에 의존하여 느끼도록 만든다. 그것은 우리에게 “나는 이것이다.” 또는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행복을 위해 외부적인 것들에 의존하게 된다. 에고는 다른 모든 생각 뒤에 서 있는 ‘나라는 생각’에서 생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기까지 하는 일이 자신의 에고를 고착화시키는 것이다.
불교 유식학은 에고의 실상을 설명해 주는 또다른 설명 방식이다. 유식학에 의하면 인간은 인류역사의 경험을 내장하고 태어나고 삶의 활동에서 획득된 경험을 저장·훈습시키면서 각자의 심층의식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경험한다. 외부의 사물이 감각기관에 의해 기계적으로 반영되거나 수동적으로 경험되기보다 인간은 사물을 대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저장된 ‘심층적 마음의 염색된 눈’으로 사물을 대한다.
모든 대상적 존재는 단지 각자의 훈습된 마음에 지나지 않고 모든 대상의 인식은 오직 마음에서 비롯된다. 유식학에서는 허망분별의 에고를 떠나 온전한 인식을 이루는 마음의 변형을 전의(轉依)라 부른다. 전의에 의해서 얻게 되는 것은 자기와 우주가 청정하게 되는 것, 신체와 정신이 아집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는 것, 자기 내면에서 최고의 참다운 본래성이 현현하는 것, 그리하여 그 지혜의 작용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짐이다. 청정한 마음과 무지가 사라진 앎으로 인하여 대상이 청정해진다.
인간 삶의 지향점은 에고의 변형에 있다. 이는 내면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심령적 변형과 직관을 통해 마음의 고양과 확장을 가져오는 영성적 변형, 그리고 우주적 나(Self)와 일체가 되는 초정신적 변형을 목표로 한다. 불교 천태학에서는 “깨달은 자도 무명을 갖추고 있고 단지 무명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라 말한다. 무명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과 에고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은 유사한 의미이다.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에고를 통어한다는 것이고 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아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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