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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매일신문-기고] ‘채움’과 ‘비움’의 학문이란
[전라매일신문-기고] ‘채움’과 ‘비움’의 학문이란
마음인문학연구소2015-01-11

‘채움’과 ‘비움’의 학문이란

 

2015년 01월 11일(일) 20:15 [(주)전라매일신문]

 

 

 

 

 

ⓒ (주)전라매일신문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philosophy’의 번역어로서의 ‘철학(哲學)’의 의미는 다분히 희랍적 전통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동양철학에는 그런 전통이 존재하지 않다. 장자는 “천지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줄은 알지만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객관적 자연의 본질이나 질서에 대한 것보다는 인간 자신의 문제에 최우선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우리의 ‘삶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철학은 ‘덕성德性’관념을 중시하고, ‘주체성’과 ‘내재적 도덕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서양철학에는 없는 ‘수양’ 즉 ‘실천’의 문제가 대두된다. 수양이란 실천적 방법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상적 인간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 도가 불가를 막론하고 각기 ‘성인’, ‘지인至人’, ‘부처’ 등 이상적 인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 인간을 실현하는 학문은 경험과학에 토대를 둔 ‘경험 학문’과는 구별된다. 노자는 “위학(爲學)은 날로 쌓아가는 것이고, 위도(爲道)는 날로 덜어가는 것이다. 덜어내고 덜어내어서 무위(無爲)에 이른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48장)라고 말하면서 위학과 위도의 공부(학문)를 구별하고 있다.

 

 

 

 

먼저 ‘위학(爲學)’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과 같은 경험과학과 삶의 도구를 획득하기 위해 하는 학문이 다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학문은 모두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 즉 ‘일익(日益)’의 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의 축적은 또한 인간들의 욕망의 증가와 연관된다. 현대의 학문은 모두 과학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의 복지와 행복, 편리를 위해 발전해 왔다. 이것은 다른 면에서 보면 인간들의 무한 욕망충족을 위해 기여하는 일면이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의 주된 관심은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을 발전시키고 무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다 인간들의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가지고 오고, 곧 인간의 만족과 행복의 실현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인간들이 물질적 풍요와 만족이 진정한 인간들의 행복일까를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경우든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고, 인간의 무한한 욕망 충족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러한 과학적 지식은 도리어 인간들에게 불행을 가져올지 모른다.

 

 

 

 

그래서 ‘위학(爲學)’의 공부만을 추구하는 것을 노자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바로 인간들의 자기상실의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위도(爲道)’의 학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실상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학에서 연구하는 어느 학문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가르치고 탐구하는 이른바 학문의 영역을 잠시 벗어나 우리의 삶의 전체적 영역에서 보면, 위도(爲道) 공부의 중요성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 즉 진정한 삶의 의미와 방향성에 대한 우리의 물음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의 방향은 ‘위학’의 방법과 차이가 난다. 오늘날 경험과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에서 추구하는 지식이 모두 경험에 의존해 얻어진 것이고, 그러한 것은 자신의 밖에 있는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에 대한 지식은 자신의 외면으로 물어야 하지만, 나의 생명, 나의 삶의 의미에 관한 문제는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래서 ‘위도일손(爲道日損)’은 추구의 방향을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일익(日益)’이 ‘채움의 방식’이었다면, ‘일손(日損)’은 ‘비움의 방식’으로 경험의 세계에서 오는 지식과 감각적 욕망을 반성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경지인 것이다. ‘일손(日損)’의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것은 자연과학적 의미의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 생활 영역에서 체현되어지는 ‘삶의 지혜’에 해당하는 것이고, 실천을 통해 도달되는 경지의 의미인 것이다.

 

 

 

 

이런 경지에서 노자는 바로 인간의 진정한 정신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고, 참다운 삶의 의미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노자가 비록 ‘위학(爲學)’ 공부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위도(爲道)’ 공부만으로도 살아 갈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는 바로 ‘위학’과 ‘위도’가 적절하게 잘 조화를 이룰 때 보다 이상적 삶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삶의 도구를 획득하기 위한 위학공부도 무척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자신의 삶의 의미와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묻는 위도공부의 중요성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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