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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매일신문-기고]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의미하는 것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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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인문학연구소2014-12-21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의미하는 것은?
2014년 12월 21일(일) 21:46 [(주)전라매일신문]
ⓒ (주)전라매일신문
오늘날 ‘논어’를 비롯한 동양고전을 읽을 때 다만 자구적 해석에 치중하는 훈고학적 태도나 성현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처세술의 한 방편으로 이해하는 것에 머물 수 없다. 우리가 철학적 관점에서 ‘고전’을 이해하려는 것은 그 속에 녹아 있는 삶의 보편적 문제의식을 읽어내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발전해 감에 따라 삶의 도구가 편리하게 발달됐고, 삶의 환경이 개선돼졌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하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2,500여 년 전의 공자는 어떤 철학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는가? 그는 무엇보다도 현세를 넘어선 내세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지는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그의 제자가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아직 생조차 모른데 어떻게 죽음을 알리오!”라고 대답했고, 또 귀신에 대해 물었을 때 “사람조차도 섬기지 못하는 터에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 공자의 모든 관심의 방향은 현세의 인생문제 해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번 밖에 살수 없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을 어떻게 다 실현하는가에 그의 철학적 관심이 모아져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이러한 인간다운 삶의 실현은 어디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는가? 그는 자기 극복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공자는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실천하는 것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사욕을 통제하고 극복해 삶의 보편적 원리인 ‘예’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다움(仁)을 실현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성이 우리의 이성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반대로 이성이 우리의 감성을 지배하게 해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그러한 욕망을 극복해 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극기복례克(克己復禮)’에서 ‘극’은 이긴다는 것이고, 다른 말로 하면 제거한다는 것이다. ‘복復’은 직역하면 ‘돌아온다는 것’으로 무엇을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제거하고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 것인가? ‘극기’는 우리의 생명 중에서 부정적 측면인 사욕을 제거하고 없애버리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사욕을 제거함과 동시에 긍정적인 측면에서 어떤 것을 회복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긍정하는 것은 적어도 사리사욕에 속하거나 이기적인 것(selfish)에 속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예(禮)라는 상징적인 용어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 바로 이성(理性)을 대표하는 것이고,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자연 생명에서 위로 한 차원 높은 도덕생명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과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와 연계해 인간을 감각적 자연생명의 충족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한다. 자연생명의 해방만을 외치는 것은 일종의 방종이 아닐까? 무분별한 감각적 충족만을 강조하는 것에서 인간은 타락의 길로 접어든다고 할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삶의 책임의식과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란 물음을 자신의 내면에서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성(理性)도 구분이 필요한 개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성은 대부분 이론이성, 즉 도구적 이성이다.
우리의 도덕실천을 말하는 이성은 도덕이성이다. ‘극기복례’를 통해 회복하려는 이성은 이론이성이 아니라 바로 도덕이성이다. 도덕이성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지를 묻는 것이고, 삶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고 이상의 방향을 결정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극기부례’의 과정을 통해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도구이성이 아니라 도덕이성이다. 도구이성을 통해 인간을 보는 것은 실용적 가치, 도구적 가치로만 보는 것이다. 인간을 도구로 보는 것은 인간을 짐승의 차원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동물에게는 도덕실천이 없다. 도덕실천이란 인간을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하게 하는 것이며,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인간을 동물로 본다면 실천이란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도구이성만을 강조하고 인간의 욕망충족에만 전력한다면 바로 인간이 동물의 차원으로 떨어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극기복례’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우리의 감성을 제어하고 우리의 감성을 이성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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