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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매일신문-기고] 용기에 대해서 생각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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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인문학연구소2014-08-15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용기에 대해서 생각한다
마음학교 시민강좌
2014년 08월 15일(금) 19:19 [(주)전라매일신문]
ⓒ (주)전라매일신문
서구인이 자신을 이해해 온 주요한 축의 하나는 4주덕을 내용으로 하는 윤리학이다.
기독교 윤리론처럼 계명과 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인간의 당위를 말할 때 적법한 방편일 수 있으나 이 경우, 당위의 주체인 인간이 행위의 맥락에서 사라질 위험이 있다.
이와 달리 덕론은 자연스럽고 명확히 인간을 전면에 내세우고 인간에 대해 말한다.
사려, 정의, 용기, 절제는 인간을 그 가능성의 극한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기본 덕들이다. 정신적 인간의 완성된 능력을 뜻하는 덕은 능력의 완성태로 본능적 올바름이 아니라 신중함, 즉 완성된 결정 능력을 통해서만 덕이 된다.
그래서 신중함, 즉 사려는 여타의 덕들인 정의, 용기, 절제의 척도로 기능한다. 참된 인격적 존재는 ‘실제의 인식 속에서 완성된 이성’이 우리의 의지와 활동을 내적으로 규제하고 형성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려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말은 의지와 행위가 진리에 정향돼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의지와 행위가 사실, 실제에 정향돼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려 본연의 임무는 따라서 실제에 대한 지식을 선의 실현으로 바꾸는 데 있다. 이 선의 실현이 가능해 지도록 인간의 정신을 보호하는 덕이 바로 용기이다. 용기의 전제조건은 인간이 다칠 수 있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용기란 상처와 고난을 감수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처와 고난은 죽음이기에 용기는 죽음과 관련이 있다. 결국 용기란 싸움에서 죽을 수 있는 준비를 뜻한다.
그리고 이런 준비는 실전에서 증명되는 것이라서, 용기는 피의 증거 속에서 완성된다. 기독교 신학에서 순교를 용기의 가장 실제적이고 높은 행위로 여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경시와는 무관하다.
용기 있는 자가 고난을 감수하는 것은 더 깊고 본질적인 상처 입힐 수 없는 것을 지키고 얻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감수하는 고통과 고난이 큰 불행임을 알면서도 견딜 때 진정 용기 있는 자가 된다.
그는 사태의 정황을 명백히 알기 때문에 이 불행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용기 있는 자는 이 두려움에 의해 강제로 악한 일을 행하거나 선한 일에서 떠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또 선을 실현하기 위해 때로 이 두려운 일로 자발적으로 나감으로써, 용기 있는 자가 된다.
그것이 합당한 일이라면 이런 불행을 노여워하며 공격하고 물리치는 것도 용기이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심각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것이 용기이기에 용기의 실제 행위는 ‘견뎌냄’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저항의 가능성이 견뎌냄이다. 용기의 불가피한 요소인 이 인내를 통해 인간은 불행을 목전에 두고도 무질서한 슬픔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투명하게 사태를 직시하는 것이다.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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