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활동
[전라매일신문-기고] 종교 속 정의 이야기 | |
---|---|
마음인문학연구소2014-06-20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종교 속 정의 이야기
2014년 06월 20일(금) 19:46 [(주)전라매일신문]
ⓒ (주)전라매일신문
우리 사회의 무너진 ‘정의’는 일상에서 불안을 느끼고 생명을 위협당할 만큼, 불안전과 연결돼 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우리사회의 모순들과 부정의들이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것을 본다. 부정의한 사회 속에서 시스템이 무너질 때 가장 위협을 받는 이들은, 시스템이라는 피라미드의 바닥에 놓인 사람들이다. 선박 안의 어린 학생들과 비행기 아닌 배로 제주도를 가야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때에 고대로부터 전해진 이야기가 오늘까지도 영감을 준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보통 구약성경의 신인 야훼는 ‘정의’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다.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인들이 탈출하는 이야기가 담긴 출애굽기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은 이집트에서 핍박받고 있는 자국인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나려고 했다. 그들의 신, 즉 ‘히브리인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절대군주자인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파라오는 그 요구에 대해서, 더 폭압적인 정책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눌렀다. 흙벽돌을 만드는데 쓸 짚을 주지 않고 눈에 띄는 대로 짚을 발견해서 벽돌을 만들게 한 것인데, 공사 자재를 주지 않으면서 같은 생산량을 요구하는 노역을 시킨 것이다.
제대로 된 대가는커녕 기본재료도 주지 않은 채로 제대로 된 생산량이 나올 수 없는 노역 상황에서, 자국민 백성들을 감독하는 이스라엘인 감독들이 파라오에게 갔다. 그들에게 파라오는 백성들의 잘못이, 자재를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 ‘게으름’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면서, 불평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명령했다. 짚을 공급받을 생각은 하지 말고, 생산하는 벽돌의 수량은 줄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파라오 면전에서 물러난 이스라엘 감독들은 오히려 모세와 아론에게 분풀이를 했다. “야훼께서 너희들을 내려다보시고 벌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이 우리를 역겨워하게 된 것은 너희들 탓이다. 너희 때문에 그가 칼을 빼어 들고 우리를 치는 것이 아니냐?”(출애굽 5, 21) 이 이야기는 신의 이름으로 정의를 이야기하고, 민족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국인들을 대변해야 하는 ‘감독자’들의 반발을 받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추구하며 몸보신하는 타입, 정의와 자유 같은 것은 상관없이 시스템 안에서 ‘윗선’의 눈치를 보는, 그야말로 관료적인 인간형들이다.
야훼는 모세를 통해서 파라오보다 신의 정의가 한 수 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들을 만들어 보이기로 약속했다. 이집트에서 혹사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서 가나안 땅을 주기로 했던 계약을 상기했던 것이다. 신적 정의라는 심판으로 궁극에는 백성들이 해방될 것이라고 약속이었다.
모세는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대로 전했지만, 힘겨운 고역에 시달려서 현실 이외의 대안을 생각하거나, 희망이 있음을 꿈꿀 겨를이 없을 만큼 지친 이들에게 이러한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우리 사회의 ‘히브리인’들은 누구인가. 정신 노동자이든 육체 노동자이든 우리들은 힘든 일상 속에서 자유와 정의가 우선되는 대안을 생각할 수 없고,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작은 이익 하나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잃어버리는 하나가 우리들에게는 ‘전부’일 수 있을 만큼 우리 삶의 환경이 척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할 것인가.
모세는 결국 이스라엘인들을 거느리고 홍해바다를 건넌다. 우리 사회에 정의를 이야기하는 ‘모세’가 있는가. 적어도 ‘세월호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 안에 ‘모세’가 있는지 곰곰이 묻게 된다.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 최정화 교수
http://www.e-jlmaeil.com/default/all_news.ph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