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라매일신문-칼럼] 용서
[전라매일신문-칼럼] 용서
마음인문학연구소2015-01-18

마음인문학 칼럼, 용서

 

2015년 01월 18일(일) 19:36 [(주)전라매일신문]

 

 

 

 

원광대학교 병원 앞 신호대기 중이다. 차량 한 대가 큰 소리로 경적을 울리면서 앞차량을 위협한다. 자동차 한 대는 허둥지둥 도망을 가고 다른 한대는 앞 차를 따라간다. 앞차가 허둥지둥 골목길로 들어가자 뒤따르던 자동차가 골목길까지 쫓아간다.

 

함께 동승한 지인이 말한다.

 

“큰일났네요. 아까보니까 앞에 가는 차가 급정거를 해서 사고날 뻔 했거든요, 그러더니 저렇게 쫓아가네요”

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뒤를 쫓는 운전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양이다.

‘얼마나 놀랐을까?’ 아마도 너무 놀라고 화가나서 상대방을 용서하기 어려운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여유롭고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서 여유로운 성인군자가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지금의 나를 보면 내가 만든 개념과 정의라는 틀에 갖혀 용서하지 못하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Enright는 사람들이 여섯가지의 형태로 용서를 한다고 보았다.

내가 당한만큼 갚아주게 되었을 때 용서를 하는 ‘복수적 용서’.

상처받은 마음이 회복되었거나 미워하는 마음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을 때 하는 ‘보상적 용서’.

주변사람들이 용서하기를 기대하거나 권할 때 하는 ‘기대에 따른 용서’.

종교적 가르침이 용서를 요구하거나, 용서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갖게 되는 죄의식 때문에 하는 ‘합법적인 기대에 따른 용서’.

사회적인 갈등과 마찰등을 줄이고 원만한 사회관계를 형성하고 싶을 때 하는 ‘사회적조화로서의 용서’.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무조건 용서하고, 용서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하지도 않고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주는 ‘사랑으로서의 용서’가 그것이다.

 

 

Enright의 용서형태를 보면서 나는 어떠한 형태의 용서를 주로 사용했었는가 되돌아 본다.

나 자신의 용서형태를 살펴보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최소한’이라는 내가 만든 개념이 나를 괴롭히고 있음을 발견하다.

‘최소한 양심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최소한 이정도는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만든 최소한의 한계를 확장시키다 보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 사라지고, 대가를 치르고 싶은 앙심도 조금은 가라앉게 되는 것을 본다.

 

 

 

 

가끔은 나도 주변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타협과 같은 용서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를 끝까지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은 ‘최소한’이라는 내가 창조한 나의 한계임을 발견하게 된다.

 

 

 

 

을미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최소한’이라는 한계를 내려놓고 한계가 없는 사랑으로서의 용서적 태도를 연습해야 겠다.

 

 

 

(전북청소년 상담복지센터)

 

http://www.e-jlmaeil.com/default/all_news.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