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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매일신문-칼럼] 이 시절, 나의 묘한 인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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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인문학연구소2014-11-30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오덕진 /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강사
사춘기를 심하게 겪은 편이었다. 그 때는 부모님과 사소한 일로도 감정적으로 큰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에 ‘왜 나는 지금의 부모님을 만났을까?’ 하는 의심이 많았다. 자상하고 이해심이 많은 부모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다 문득 백화점이나 시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묘하게 만난 인연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병환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게 되면서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어렸을 때는 ‘왜 우리 부모님을 만났나?’ 의심이 됐는데 이제는 ‘왜 부모님 모두 병고로 힘든 생활을 해야 하고, 자식인 나는 아픈 부모님을 모시며 몸과 마음의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왜?’라는 질문 속에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야 하는 것을 부정하고, 내가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을 마주해야 것을 거부하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지금 여기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내 삶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에 내가 부모님을 고른 것이 아니라 묘하게 만났듯이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묘하게 만난 것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만나는 모든 인연이 다 묘한 것이다. 사람이든 상황이든.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 부모님을 만났고, 갈등이 가장 많았던 내가 아픈 부모님을 모시게 된 상황도 수많은 변수 속에서 전개되었으니 말이다.
묘함을 느낄 때 좋고, 나쁨을 넘어서 삶 그 자체를 보게 된다. 고통스러운 시절의 인연, 즐거운 시절의 인연도 다 묘하게 느낄 때 고락을 넘어선 극락을 보게 된다. 지금 이 순간과 옆에 있는 사람도 ‘묘한 인연이구나.’하고 바라보면 ‘어떻게 이렇게 만나게 되었을까? 어떻게 꼭 이렇게 되었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어떠한 인연이라도 묘하다고 느낄 때 이완되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원효대사는 ‘인연이 없는 자리에서 묘한 인연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다. 모르면 모든 것이 우연이지만 묘함을 느끼고 보면 다 묘한 필연이다.
대개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반사적으로 좋다ㆍ나쁘다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좋다ㆍ나쁘다 판단하기 이전에 ‘묘한 인연’으로 바라본다면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쌓일 것이다. 그 힘은 고통과 괴로움의 감정까지도 껴안으면서 ‘지금 여기’를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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