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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도 벅찬데, 공익심 왜 중요한가?
내 삶도 벅찬데, 공익심 왜 중요한가?
마음인문학연구소2023-02-01

내 삶도 벅찬데, 공익심 왜 중요한가?

글. 김일원  교무·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일상수행의 요법 9조는 사요(四要; The Four Essentials) 가운데 그 네 번째, 공도자 숭배(公道者 崇拜; Venerating the Public-Spirited)의 실천 조목이다. ‘공도자 숭배’란 공중을 위해 헌신한 공익 실천자(공도자)를 우러러 공경하자(숭배)는 것인데, 공도자를 부모와 같이 극진히 섬기면 공도주의가 자연 세상에 편만하여 우리의 생활이 평등하게 골라질 수 있고 이는 결국 강자와 약자 모두가 번영하면서 진화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개선하여 평등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긴요한 길로서 원불교에서는 ‘사요’를 제시하고 있는 바, 소태산 대종사는 공도자를 존숭하는 한편 그 공익심을 본받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공존’을 위한 중요한 실천 행위로서 강조하고 있다.

일상수행의 요법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이에 ‘공도자를 공경하는 사회 풍조’가 왜 꼭 필요하며 현대사회에서 ‘공익심 있는 나’로 살아가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야기 해 보려 한다.

첫째, ‘공도자를 우러러 공경하는 것’이 이 시대에 왜 꼭 필요한 것일까? 그냥 마음나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요즘 온라인상에서 자주 보게 되는 신조어가 하나 있다. “가서 돈쭐을 내주자”, “돈쭐 내줘야겠네”와 같은 표현이다. 이는 예컨데, 한 기업이 결식아동들을 위해 엄청난 기부금을 냈다던가, 치킨집 사장님이 어려운 형편의 형제에게 대가 없이 치킨을 제공했다던가 하는 이런 미담에 감동 받은 네티즌들이 해당 기업·식당의 제품을 많이 이용함으로써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소비 행위가 우리 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고려하여 환경과 사회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소비하고자 하는 윤리적 소비의 한 예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사적인 이익만을 생각하지 않고 이웃, 사회, 환경을 위해 공헌하는 이들의 선행을 이렇듯 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적극 칭찬 보상하는 것은, 사회 전반에 선행을 북돋우는 분위기를 형성해 가고 선한 영향력이 퍼져가게 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장려되어야 할 현상이다. 다수의 동심원 파동이 퍼져 나아가게 함에 따라, 당사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활동·행위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하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만 잘 살려고 하는 이기주의의 만연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사회공동체 의식이 확산되도록 함에 따라, 서로가 함께 진화하는 상생의 열린 시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하기 때문이다. 공중을 위해 헌신하고 널리 대중을 유익 주는 실천자들을 존숭하는 사회 풍조가 왜 만연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며, 이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여야 하는 이유이다.

둘째, ‘공익심 있는 나’로 살아가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일까? 내 코가 석자이고 내 삶, 내 가정 하나도 벅찰 때가 많지 않은가?

‘공익심(公益心)’이란 이웃, 사회, 국가, 세계 등의 공공을 위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래서 참으로 듣기 좋고 아름다운 말인 줄은 알겠는데, 어떻게 보면 대단히 구현하기가 어려운 말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공익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가치에 대해 지공무사(至公無私), 무아봉공(無我奉公), 멸사봉공(滅私奉公)과 같은 말로 주입되어 온 것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속 깊은 공부를 통해 결과적으로 나와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것 자체를 목표로 삼기보다, 왜 공(公)의 가치, 공공의 이익이 중요한지에 대해 그 까닭을 궁구하고 알아차리는 연습이 우선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한 선생님이, 자신이 대학생 때 사회에서는 오존층 파괴 및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헤어스프레이 사용을 지양하라 했는데 자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것으로 머리를 정돈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 진짜로 그때의 경고가 현실화되면서 대기오염 및 기후위기 등으로 미래 세대뿐 아니라 당장 내가 살기 힘든 세상을 맞닥뜨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젊은 세대들에게 굉장히 미안해하면서) 한 적이 있다.

이 짧은 에피소드는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크다. 이 세상이 나 혼자만 살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생태계 먹이사슬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이 있어 네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머나 먼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곧 나와 내 가정의 위협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렇듯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을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이롭게(自利) 하는 삶이 공공의 이익(利他)을 떠나서 생각될 수 없다. 공익심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거든 이를 바로 알아차려 공익심 있는 생활로 돌려 나아갈 때, 외롭고 팍팍한 ‘독존’이 아닌 서로를 진화시켜 가는 ‘공존’이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 일상수행의 요법 9조 실천 점검하기

※ 아마도 왼쪽, 오른쪽 둘의 경험을 많이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의 빈도가 더 높은지가 핵심입니다.

김일원 교무

http://www.m-wonkwang.org/news/articleView.html?idxno=10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