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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일상에서 영성의 길을 찾다
소태산, 일상에서 영성의 길을 찾다
마음인문학연구소2022-10-28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 그는 우리가 사는 지금과 그리 멀지 않은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살다간 성자이다. 그는 근대 과학 문명의 급속한 팽창과 그 폐해, 일제강점기 민중의 아픔과 망국의 한을 몸소 체험하였다. 그 속에서 영적 여정을 쉬지 않았고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이 나라가 장차 세계의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이 될 것을 예견하였다.

소태산의 영적 여정은 평범한 의문에서 비롯된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의문,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의문 등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만 갔다. 밖으로 산신을 만나고자 기도를 올렸고, 스승을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한 채, 입정(入定)에 들기를 반복하였다. 마침내 크게 깨달은 그는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그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다.”라고 대각 일성을 밝혔다. 그리고 이를 ‘일원상(一圓相, ○)’으로 그렸다.

소태산의 깨달음으로 시작된 원불교(圓佛敎)! 오늘날 국내 4대 종교의 하나로서 국가의 주요 의례에 참여하고, 군종장교를 배출하는 공인종교(公認宗敎)의 역할을 함께 하고 있다. 전 세계 24개국에 100여 개의 교당·기관에서 130여 명 이상의 출가자가 교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정부의 인가를 받은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The Won Institute of Graduate Studies)는 어느덧 개교 20주년을 맞이하였다. 지난해에는 최초의 국외 총부인 미국 총부가 설립되고 미국 종법사가 추대되었다. 과연 소태산의 어떤 가르침이 원불교를 민족의 울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게 하였을까?

소태산의 가르침과 원불교의 성립에 큰 영향을 준 두 사상! 하나는 새 시대에 대한 민중의 간절한 열망을 담은 개벽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보존해 온 불교사상이다. 개벽이라는 시대적 열망과 불교라는 보편적 가치의 만남이다. 한마디로 원불교는 ‘개벽과 불교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대각 이후, 소태산은 동·서양의 여러 경전을 두루 열람했다. 유독 <금강경>만은 꿈에서 그 경명을 알고 가까운 불갑사에서 구해보았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성인 중 성인’이다, 장차 불법을 연원하여 새 회상을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한 소태산은 불교가 장차 세계적 주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불교가 무상대도(無上大道)이기 때문이다. 즉 “불법은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있으며,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고 있으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있으며, 수행의 길을 잘 갖추고 있다. 그래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 바가 있다.”

다만 앞으로 세상에 필요한 미래의 불법은 직업 생활을 떠나지 않는 불법, 재가와 출가가 차별 없이 함께 공부하는 불법, 공부와 일, 공부와 생활이 둘 아닌 불법, 불공의 대상과 처소가 따로 있지 않는 불법이라야 한다. 어디나 법당이고 누구나 부처인 시대! 법당과 부처가 따로 없는 세상에 필요한 가르침이라야 한다.

이러한 소태산의 가르침은 불법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로 정리해볼 수 있다. 소태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메시지는 시대와 인심을 반영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종교가 되자는 것이다. 소태산은 개벽의 흐름을 계승하여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개교표어를 제창하였다. 그리고 과학(물질) 문명과 도학(정신) 문명이 잘 조화된 참 문명 세계를 지향하였다. 이는 <정전> 개교의 동기에도 잘 밝혀져 있다. 개교의 동기에서는 오늘날 우리 인류가 겪고 있는 고통의 배경으로 물질과 정신의 부조화와 불균형에 주목하였다.

오늘날 인류는 그 어느 때에도 누리지 못했던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편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야 할 인간이 오히려 그에 끌려 ‘물질의 노예’로 전락함으로써 파란고해가 한이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도 공부와 사업을 함께 할 조직이 필요했다. 열 사람이 한 단이 되는 ‘십인일단(十人一團)’의 조직이다. 최초의 단은 소태산(단장)과 신심 있고 진실한 아홉 사람(9인 단원)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모두 근동의 친척, 친우들이다. 다만 경상도 성주에서 스승 찾아 전라도에 온 17세 정산 송규(鼎山 宋奎)는 직접 정읍까지 마중하여 중앙 자리에 앉혔다.


ⓒ 원포털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임시 교명)는 창립 과정에서부터 민주적 절차와 합리적 제도를 중시하였다. 공화제도(共和制度)는 회상 창립 과정에 철저히 지켜졌다. 정기총회, 평의원회 등 대의제 중심의 회의체는 물론, 모든 단원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단회가 있다. 단회에서는 의견 제출 제도를 시행하였다. 즉 공부·사업·생활의 3방면으로 필요한 의견을 단회를 통해서 제출되고, 단회에서 심의하여 채택하며, 채택된 의견의 실현을 위해 합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모두가 공동체의 주인으로 거듭났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소태산의 메시지, 두 번째는 일상의 경계에서 공부하는 생활종교를 지향하라는 점이다. 불법연구회는 종교의례만이 아니라 관혼상제 등의 가례 등도 공동체 안에서 함께 진행되었다. 허례는 폐지하되 예의 본의는 더욱 살리는 ‘예법혁신’을 단행하였다. 실제 장녀 박길선의 혼례를 평소 입던 옷을 정갈히 입은 채, 예물 없이 고구마를 공양하는 등 모범을 보였다.

또한 여름, 겨울로 선원에 입선(入禪)하여 정기훈련을 하였다. 입선은 공회당 등 대중이 쉽게 오갈 수 있는 장소에서 주로 진행되었다. 당시 훈련 일정은 8시간 공부, 8시간 취침, 8시간 문답감정 및 자유 시간이었다. 8시간 공부는 2시간 좌선, 2시간 일기, 2시간 경전, 2시간 염불 혹은 강연과 회화 등으로 진행되었다. 훈련 후에는 각자의 학력을 고시하여 자신의 공부 정도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정기(定期)와 상시(常時)를 넘나든 훈련을 통해 일상에서도 영적 수행이 이어지도록 하였다.

또한, 진리 불공과 실지 불공을 함께 하도록 하였다. 소태산이 변산에 머물고 있을 때, 며느리와 관계가 좋지 않아 불공하러 간다는 노부부에게 ‘산 부처’에게 불공하도록 한다. ‘산 부처가 어디에 있느냐’는 노부부의 질문에 바로 ‘며느리가 곧 산 부처’라고 답한다. 부처란 죄복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분인데, 노부부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는 권능을 바로 며느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부부는 소태산의 가르침대로 며느리에게 정성껏 불공을 드렸더니, 몇 주 사이에 그 며느리가 효부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어느 날 종교시찰단이 불법연구회를 방문해서 ‘귀교의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자, 잠시 후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농구를 메고 들어오던 산업부원들을 가리키며 저들이 ‘우리 집 부처님이다’라고 하였다. 소태산은 앞으로 새 세상의 종교는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닌 산 종교라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영과 육을 쌍전하여 개인, 가정, 사회, 국가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오늘 우리에게 소태산이 주는 메시지, 세 번째는 세상에 유익을 주는 실천적이고 참여적인 종교가 되라는 점이다. 소태산이 단을 꾸리고 처음 했던 일이 바로 ‘저축조합’이다. 금주 금연, 허례 폐지 등을 통해 모은 자금으로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 앞바다를 막아 2만 5천 평의 간석지를 만드는 대 역사를 이루게 된다. 이를 경제적 토대로 원불교의 자립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이를 통해 일하면서 공부하는 모습의 실지를 보여주었으며, 복락(福樂)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실제 삶의 현장에서 경험케 했다.

한편 공동체에 필요한 네 가지 요법을 ‘사요(四要)’라고 하였다. 사요 중 하나인 ‘자력양성’의 옛 명칭이 바로 ‘남녀권리동일’이다. 앞으로의 공동체는 남녀의 권한이 동일해야 하며, 기회와 역할이 동등해야 한다. 실제 소태산은 최종결의기관인 수위단(首位團)을 남녀동수로 제도화하였다. 여자라도 정당한 훈련을 받으면 ‘교무’로서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여자들이 남들 앞에서 강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앞에 발을 치고 강연 연습을 하였다. 소태산은 여자수위단 9인을 정하였다. 왕족부터 기생 까지 출신성분과 관계없이 한 자리에 모였다. 특히 오타원 이청춘(李靑春)은 전주 기생 출신인데, 전주지부를 대표하는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여성전무출신제도’(여성출가제도) 수용에 대한 의견제출을 제안하기도 하였으며, 전주지부 설립에 큰 역할을 하였고, 전주지부의 교무로서의 소임도 다했다.

한편 당시는 소태산과 불법연구회도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특히 독립지사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의 불법연구회 방문을 계기로 일제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청하원을 주재소로 삼고 감시를 본격화하였다. 이때 파견된 조선인 순사가 바로 황가봉이다. 그는 아예 직접 입회원서까지 제출하고 사복을 입고 상주하며 소태산과 불법연구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다른 회원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았지만, 소태산은 그에게 두 하늘을 뜻하는 ‘이천(二天)’이라는 법명을 주었다. 결국 황이천은 감화를 받아 불법연구회의 호법(護法) 역할을 담당했다.

1943년 해방을 두 해 앞두고 소태산은 열반에 들었다. 일제는 소태산의 열반 후 불법연구회는 곧 와해될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장례를 치룬 후 곧바로 수위단 중앙이었던 정산을 종법사로 추대하였다. 불법연구회는 곧 안정을 찾고 일사불란하게 위기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

식민지 촌락의 한 소년이 품었던 의문이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 전해졌다. 특히 일원상(○)을 통해 ‘표층종교’에 머물지 않고, ‘심층종교’로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하였다. 갈라졌던 두 세계, 성과 속, 수도와 생활, 공부와 일, 영성과 일상 등을 모두 하나로 통하게 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상 속 영성의 길, 영적 삶을 살아가도록 제시해준 소태산! 그의 가르침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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