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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칼럼 [오늘과 내일] 부안에 흐르는 매창의 예술혼
새전북신문 칼럼 [오늘과 내일] 부안에 흐르는 매창의 예술혼
마음인문학연구소2021-08-28

/손시은(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매창(梅窓, 1573~1610)은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조 기녀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면면히 이어진 부안의 예술혼을 대변하는 아이콘이다.

아무리 빼어난 실력과 인품을 갖추었어도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의 친구와 이웃들에게 인정받기는 어려운 법이다. 코 찔찔거리고 생떼 부리는 아이 때부터 온갖 모습을 속속들이 다 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저 한 동네에서 함께 놀고 어울린 ‘코찔찔이’, ‘떼쟁이’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매창은 평생토록 고향 부안을 떠난 적이 없건만 언제나 부안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자기애 강한 황진이는 자신과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를 일컬어 스스로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했다지만, 매창은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사랑과 절개를 각별하게 여긴 부안 사람, 신석정 시인에 의해 그의 연인인 촌은 유희경(劉希慶, 1545~1636), 부안의 절경 직소폭포와 함께 부안삼절(扶安三絶)로 불렸다.

또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매창의 시 몇 수쯤은 외워 읊조렸기에 매창이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나 부안 개암사에서 매창의 시집인 『매창집(梅窓集)』이 간행될 수 있었다. 매창에게는 효성스러운 자손도 없었고, 재력 있는 사대부의 후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매창집』은 오로지 십시일반 부안 사람들의 자발적인 추렴에 의해 이루어졌다. 저마다 외우는 매창의 시를 늘어놓고 비교해 가며 한 작품 한 작품 모아 엮었을 그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출신보다는 그 사람의 됨됨이와 능력 그리고 예술적 가치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부안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매창의 주옥같은 시편은 무심한 세월 너머로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여느 기녀들의 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매창테마관에서는 머리 허연 팔순 어르신이 ‘매창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시조를 한바탕 멋들어지게 부르고, 매창의 시심을 이어받은 아낙네가 매창 묘를 바라보며 꾹꾹 눌러 쓴 자작시를 낭랑하게 읊어댄다. 저렇게 긴 시를 어떻게 다 외웠을까 놀랍기도 하고 황홀경에 빠진 듯 한껏 도취한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매창의 예술혼을 곱게 품은 부안 사람들의 마음에 다시금 뜨거워진 가슴으로 바로 옆 매창공원으로 향한다.

매창공원에는 소나무에 둘러싸인 매창의 묘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부안 사람들은 ‘매창이 뜸’이라는 정감어린 이름으로 더 많이 부른다. 매창 묘 왼쪽 앞에는 매창을 잊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상처럼 단아한 필체로 쓰인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 여섯 글자가 새겨진 돌비석이 있다. 1655년 매창 무덤에 세운 작은 비석의 글씨가 풍우에 씻겨 알아보기 어렵게 되자 1917년 부인지역 시인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명원’이라는 말에서 매창에 대한 부안 사람들의 자부심과 애정이 묻어난다. 심금을 울리는 시들과 섬섬옥수로 뜯는 조선 제일의 거문고 솜씨, 무엇보다 기녀의 신분임에도 죽는 순간까지 한 사내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지키고자 한 인간 매창을 귀히 여겼기 때문이리라.

황진이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리고 애도의 시를 읊은 일 때문에 파직을 당했다는 조선 최고의 풍류객이자 로맨티스트 백호 임제(林悌, 1549~1587)가 만약 매창을 알았더라면 황진이 무덤이 아닌 매창이 뜸에 술을 따르면서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매창은 거문고 한 곡조로 그 마음에 화답했을 것이다. 매화꽃은 진 지 오래지만 오늘도 매창의 그리움은 부안의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붉노랑상사화로 피었다가 파도 소리에 실려 임 계신 한양 땅에 전해졌으리.

http://www.sjbnews.com/news/news.php?code=li_news_2021&number=724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