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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칼럼 [전북의 창] 행복한 ‘부자바라기’로 살아가기
새전북신문 칼럼 [전북의 창] 행복한 ‘부자바라기’로 살아가기
마음인문학연구소2021-07-22

/손시은(원광대 마음인문학 연구소 연구교수)

부자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부자가 되길 원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부자바라기’임에 틀림없다. 즉, 부자를 동경하고 선망하고 욕망하며 살아간다. 자본주의 화폐 경제에서 부자가 되려면 돈을 좇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돈을 밝히면 “천박하다, 계산적이다, 돈의 노예” 같은 말을 듣기 십상이다. 소위 청담함을 추구하던 옛날의 양반들은 돈을 직접 만지는 것을 꺼려 기생에게 주는 화대를 젓가락을 집어서 줬다고 한다. 지금 세상에 그런 양반들의 젓가락돈도 아닐진대,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의 힘을 신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돈 욕심 없이 부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형제가 길을 가다가 황금 두 덩어리를 주워 나누어 가졌으나 우애를 위해 강물에 황금을 던져 버렸다는 ‘형제투금설화’는 우리나라 곳곳에 전해지는 미담이다. 이 이야기를 대학생들에게 들려주었더니 재물보다 귀히 여긴 형제간 우애에 대한 믿음은커녕 “평생 가난하게 살 팔자”라느니, “그 자식들이 불쌍하다”느니 하는 부정적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고구마 백 개를 먹은 듯 답답함에 가슴을 친다. 애초 이 설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처럼, 재물만 많고 우애가 나쁜 것보다는 가난해도 우애가 돈독한 편이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물신주의, 황금만능주의로 변질된 현대 사회에서 황금을 버린 형제의 행위는 더 이상 미담일 수만은 없다.

애초에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자본, 즉 생산 수단을 가진 이들의 이윤 획득 행위를 부추기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패러다임은 태생적으로 인간의 차별과 소외를 당연시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그 차별과 소외에서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변되는 수저계급론까지 탄생했다. 은행의 지분이 더 많은 집에 얹혀살면서, 결혼이나 노후 대책용 적금통장 하나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유일한 자본은 노동력이다. 그런데 노동의 가치는 계속 하락하는 반면 부동산이나 금융자본, 산업자본 등 재벌, 건물주가 소유한 비인적 자본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부의 편중에 따른 경제적 신분 세습화 현상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시대에 ‘팔자’, ‘자식들’ 같은 말에서 운명론적 체념과 분노가 묻어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그래서 가슴 아프다.

맹자의 말을 빌리자면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의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맹자는 백성이 살아가는 데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이 없어 방탕하고 편벽되고 사악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고 했다. 맹자가 활동했던 중국의 전국시대는 전쟁, 반란, 폭동이 끊이지 않았던 혼란기였다. 백성들은 전장으로 내몰렸고 사람의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가벼웠다. 지금은 창칼 대신 돈이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되었다. 뉴스에서는 황금을 위해 천륜을 저버리는 패륜아가 줄을 잇는다. 이런 ‘쩐의 전쟁’ 시대를 만드는 데, 부자 되기를 꿈꾸면서도 부자를 미워하고 돈을 부정함으로써 보다 고결한 인간의 가치를 지킬 수 있으리라 자기합리화해 온 사람들의 이중성과 위선이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행복은 자유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려면 부자가 되어야 한다. 돈은 행복을 얻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외면해서는 그 가능성조차 얻을 수 없다. 이제 우애를 위해 황금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항심을 지켜 행복해지기 위해 황금을 잘 활용하는 ‘진짜’ 부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http://www.sjbnews.com/news/news.php?code=li_news_2021&number=719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