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이해’
글. 장진영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장·교무
인간의 모든 일에는 반드시 시비이해(是非利害)가 따른다. 그러나 우주자연의 이치에 대하여서는 ‘왜 그렇게 했느냐, 그렇게 하는 것은 옳다/그르다’ 등의 시비이해를 따질 수 없다. 천지는 대소유무의 이치를 따라 무심(無心)으로 운행할 뿐이기 때문이다.
<도덕경>에서는 “도는 항상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 고 하였다. 우주와 만물이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도로서 운행되므로 만물이 그 생성의 도를 얻고 그 도가 운행됨을 따라 은혜의 덕이 나타나지만, 우주자연의 운행과 달리 범부중생의 실행에는 반드시 각각의 욕구와 의지에 따른 취사선택이 요청된다. 누구나 욕구가 있으며, 그에 따라 의지가 발동하고, 의지는 곧 실행과 직결된다. 우리의 심신작용은 모두 행(行)이며, 업이 된다. 행업은 각자가 짓고 그 업보도 각자가 받지만, 그 영향은 인간과 세상의 모든 관계에 미친다. 그 영향력이 인과보응의 이치를 따라 반드시 되돌아온다.
다산 정약용은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答淵兒)에서 ‘시비 이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천하에는 두 가지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시비(是非)의 저울이고, 하나는 이해(利害)의 저울이다. 이 두 가지 큰 저울에서 네 가지 큰 등급이 생긴다. 옳음을 지켜 이로움을 얻는 것이 최상이고, 그 다음은 옳음을 지키다가 해로움을 입는 것이며, 그 다음은 그름을 쫓아서 이로움을 얻는 것이며, 최하는 그름을 쫓다가 해로움마저 입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비와 이해를 나누어 주(主)와 종(終)을 밝힌 내용이다.
막상 일이 닥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옳음(是)보다는 이로움(利)을 따지게 된다. 이때 이기적 욕구가 발동하여 ‘나(에고)에게 이로운 것’을 ‘옳은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는 안으로 이기적(사적) 욕구를 덮어 감추고 밖으로 이타적(공적) 명분을 애써 드러낸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순리대로 되지 않을 때, 일단 그 행동을 반조하고 그 동기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습관 변화에 정성을 들이고,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다면 진실한 참회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비의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반드시 그 기준을 세워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밖에서 구한다. 종교 전통에서는 신(神)의 섭리에 따라 시비를 따지고, 경전의 가르침이나 스승의 말씀에 따르기도 한다. 현대인들에게는 사회적 평판이나 공적 법률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는 “시비를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은 지혜(智)의 실마리”라고 하였다. 이는 옳고 그름(是非)의 판단 기준이 바로 우리의 성품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곧 부처이고 만법이 성품의 발현이지만, 모든 행위가 다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행하는 입장에서는 각자의 행위가 자신과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분명히 판단해야 한다.
시비를 밝혀 이해가 따라오게 해야지 이해를 좇다가 시비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일을 할 때, 항상 각자의 성품(자성, 영지, 양심)에 비추어 그 시비를 제대로 판단하고, 그 옳음(是)은 취하고 그름(非)은 버리며,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데 온 정성을 다해야겠다.
출처 : 월간원광(http://www.m-wonkw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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