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이은수 교수] ‘번아웃(Burnout, 소진) 증후군’이 유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도 나도 피곤에 지친 몸과 마음으로 바쁘게 살아간다. 더욱이 효율과 효용을 강조하는 환경에서는 바쁘게 활동하고 많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 유능하다고 여겨진다. 아침에 눈을 떠 정성껏 몸을 깨우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이웃과 눈을 맞추고 미소짓기에는 교통체증이 시작되기 전 서둘러 출근하여 자리에 앉기에 바쁘기도 하다.
여유 있는 걸음으로 걷다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뒷사람에게 민폐가 되고 떠밀리듯 지하철에 탑승해 그저 지옥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날도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가속이 붙은 일상에서 유능하고 쓸모 있게 생존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며 에너지를 소진한다.
소진은 피로의 증상을 넘어서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가 모두 고갈된 상태, 더는 에너지를 부여하기 어려울 만큼 탈진된 상태를 일컫는다. 누구나 한 번쯤 소진의 신호를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소진의 초기 신호를 알아차리고 적절한 휴식과 충전의 기회를 삼을 경우,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전보다 나아진 일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소진이 주는 경고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고도 이를 무시할 경우, 소진은 일시적 어려움에 그치지 않고 일상에 지속적이고 부정적인 증상을 가져온다. 나아가서는 개인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우리는 반문하고 있다. 내게 주어진 업무와 책임, 그리고 사명과 신념이 있는데 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멈춰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한다. 비행 중 위급 상황 시 대처에 대해 안내하는데 혹시 내용을 기억하는가? 위급 상황에서는 노약자를 먼저 살피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기내방송에서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위급 상황 시 산소를 공급하기 위한 산소마스크를 어른이 ‘먼저’ 착용하라는 것이다. 아이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우기 전,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기 전, 내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산소를 공급받으라는 것이다. 산소가 부족하여 의식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가 먼저 산소를 공급받으며 무사히 살아있어야 한다.
처음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용어는 미국인 정신분석가 허버트 프로이덴버거가 심리상담을 하는 전문가들이 점차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되어 결국 극단적인 무기력감을 겪는 것을 두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심리상담사, 간호사, 사회복지사와 같이 남을 돌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성실하게 일을 계속해 나가다가 점차 과중한 피로와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이들은 의욕이 줄어들고 정신, 신체 에너지를 탈진해 결국 무기력해지고 냉소적인 태도로까지 변화됐다.
소진에 대한 연구는 점차 다양한 직업군으로 확장되고 있는데 소진의 위험이 특정 직업이나 상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지만, 소명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오히려 소진할 위험에 더욱 노출된다는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반증으로 타인을 조력하는 직군에서 특히 자기 돌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이에 대한 노력을 확산하고 있다. 부모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자녀를 보살필 수 있고, 교사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학생을 보살필 수 있으며, 교무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교도를 보살필 수 있다. 지금 내 몸과 마음은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고 있는가?
내게 주어진 역할과 소명을 다하려는 노력은 분명 가치있는 일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과 일의 범위가 확장된다. 그럴수록 더욱 자신의 산소마스크를 점검해야 한다. 신선한 산소를 충분히 공급받고 있으면서 타인 혹은 무언가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 각자가 가진 책임과 소명, 그리고 세상과 타인을 위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존중받을 만한 귀한 마음이다. 그러나 역할에 앞서 나라는 존재 자체로 살면서 내 서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산소마스크가 안전하고 단단해야 한다.
필자는 상담 현장에서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양육에 지쳐 마침내 소진된 부모를 만나게 된다. 이런 경우, 상담 초기에 지쳐있는 개인을 회복하는 의미로 일상에서 ‘산소마스크 쓰기’ 과제를 주는데 이들은 무척이나 당황하지만 이내 오랜 시간 자신에게 산소가 공급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후에 산소마스크 과제를 반복하며 다른 과제들이 더해지게 되는데, 각자 자신만의 ‘소확행’이나 작은 일탈로도 환기돼 만족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그에 더해 진정한 자기(self) 돌봄을 위해서는 일상에서 지속적인 노력과 정성의 실천이 필요하다.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13장에는 “불공에는 자기 불공과 상대 불공이 있는 바 이 두 가지가 쌍전하여야 하지마는 주종을 말하자면 자기 불공이 근본이 되나니, 각자의 마음공부를 먼저 하는 것은 곧 불공하는 공식을 배우는 것”이라 하였다.
‘각자의 마음공부를 먼저’ 하면서 타인과 세상에 긍정적 기여를 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돌보면서 많은 일정과 업무를 능숙하게 소화해낸다. 필자는 ‘자신에게 갊아있는 부처를 발견해 정성들여 불공’하며 세상을 위하는 드물고 귀한 그러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부러움과 존경심을 담아 그 비결을 묻곤 하는데 공통된 답이 있다. 직업과 종교를 불문하고 마음을 바라보고 돌보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챙김에 기초한 임상적 개입이 심리적·신체적 증상 개선에 효과적이며, 마음챙김을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자기 돌봄을 실천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수용하고, 인정하자. 자기를 수용할 수 있는 만큼 타인을 수용할 수 있다. 자기 돌봄을 하는 만큼, 타인 돌봄을 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아닐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임을 지는 관계 속에서 자기를 온전히 가꾸고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생명을 위한 산소 공급 만큼이나 우선되어야 할 중요한 일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