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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신문-기고] 지(知),정(情),의(意)로 마음병 다스리기
[원대신문-기고] 지(知),정(情),의(意)로 마음병 다스리기
마음인문학연구소2015-11-14

[특집] 지(知),정(情),의(意)로 마음병 다스리기-마음병의 세 가지 유형

 

 

 

 

우리대학 ‘마음인문학연구소’의 연구 성과를 대중과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연구소 소속 연구교수들의 글을 연재한다. 인간의 존엄성, 마음, 감성 등에 대한 글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찰해 보는 기회를 가지길 바란다. / 편집자

 

 

 

인간이 겪는 마음의 고통을 ‘마음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흔히 지(知),정(情),의(意)의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심리학의 인지-정서-행동이나 불교수행법인 계-정-혜 등과도 상통하며,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수양(定)-사리연구(慧)-작업취사(戒) 공부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여기서는 지, 정, 의 세 가지 측면에서 각각 무지, 욕심, 습관의 세 가지로 마음병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지의 병

 

지(知)는 한 마디로 앎(인식)의 문제이다. 제대로 인식(인지)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인식이 발생할 때, 이를 지적인 측면의 마음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상에서 요청되는 지식의 습득과 적용은 물론 근본적인 진리인식, 그리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견해 등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지의 측면에서 본 마음병은 ‘무지(無知)의 병’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근본에 대한 무지이며, 둘은 현실에 대한 무지이다.

 

이 가운데 불교는 무지(어리석음)의 뿌리로서 ‘근본무명(根本無明)’에 주목해왔다. 이는 ‘자아에 대한 인식’ 문제와 관련된다. 즉 이 세상은 모두 연기(緣起)된 존재로서 주어진 조건에 따라 변하는(영향을 받는) ‘무상(無常)’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본래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의 존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허망한 분별을 일으켜 ‘나’를 고정된 실체로 여기고 ‘나’에게 집착하며 아만(我慢)과 아애(我愛)를 일으킨다. 이는 표층의 일상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심층의 자아의식에 의한 것이다. 이 자아의식은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자기중심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주어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분별성(分別性)’에 떨어지고 만다. 여기서 분별성은 모든 대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분별하려는 경향성이다. 그로 인해 스스로를 항상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로, 결핍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 욕심(渴愛)에 집착(주착심)하여 고통을 자초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혜(慧) 공부가 필요하다. 그 방법은 어떤 대상을 습관적(자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챙겨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는 것이다. 의식은 지향성을 가지는데, 습관적으로 밖으로 향한다. 그 빛을 안으로 돌려 자신의 심신작용을 반조하고 성찰함으로써 마음작용의 원리를 터득하고, 스스로 행하고 과보 받으며, 만유가 서로 주고받는 인과의 이치를 깨칠 수 있다.

 

다음으로는 ‘현실에 대한 무지’이다. ‘근본무지’에 따른 ‘분별성’이 해소되었다 할지라도 일상생활과 직업생활을 영유하려면, 주어진 현실에 대한 지식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생활상식에서 전문지식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현실을 살아가는 자라면 누구나 지속적으로 주어진 현실세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새로운 지식 습득에 소홀할 경우 그로 인한 또 다른 고통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옳은 일’은 하고 ‘그른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면의 이기적 욕심이 해소되지 않은 경우, 오히려 실제 옳은 일을 택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을 쫓아 옳지 않은 일을 선택하곤 한다. 즉 ‘시비(是非)’와 상관없이 ‘이해(利害)’에 따라 그 일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시비이해는 반드시 대소유무를 따라 판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어리석음에 스스로 가려 당장의 이로움에 끌려 훗날 더 큰 해를 당하고 괴로움을 겪게 된다.

 

 

 

 

 

 

욕심의 병

 

정(情)은 정서(情緖) 혹은 감정(感情)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여기서 정서는 객관적 분위기나 주어진 느낌에 해당한다면 감정은 주관적 의지에 따른 심리작용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정(情)의 측면에서 마음병을 얘기할 때는 정서의 문제보다는 각자의 마음의 선택에 좌우되는 감정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

 

감정은 이기적 욕심(渴愛)과 관련된다. 어떤 대상이나 일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거기에 감정이 일어날 이유도 없다. 한마디로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섭섭할 이유도 없고 화낼 이유도 없다. 하지만 어떤 욕심이 있는데, 그것이 뜻대로 충족되지 않을 때 거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감정이 반드시 뒤따른다. 그러므로 감정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 감정을 일으키는 이기적 ‘욕심’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 혹은 그 욕심을 어떻게 대치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정(定) 공부로써 감정 문제를 다루었다. 간단한 방법은 ‘마음을 한 곳에 집주하는 것'(心一境住)이다. 즉 어떤 감정이나(그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을 어느 한 곳’제3의 대상’에 묶어두는 방법이다. 이로써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접할 때, 어떤 감각’느낌’이 있더라도 거기에 머물 뿐, 이기적 욕심에 끌려 마음대로 분별을 일으키거나 함부로 감정을 표출하는 일이 없게 된다. 어떤 마음이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리고 내려놓아 그 느낌 자체에만 머물게 함으로써 더 이상 2차, 3차의 생각이나 감정에 끌려가지 않도록 한다. 이처럼 감정은 조절이 가능하므로 모두가 자신의 감정을 다 표출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행동만 보고 그 사람의 감정까지 그대로 알 수는 없다.

 

욕심을 치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욕심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키우는 방법이다. 작은 욕심을 큰 욕심으로, 부당한 욕구를 정당한 욕구로 대치하는 것이다. 앞서 이기적 욕심을 ‘조절’한다면, 여기서는 이기적 욕심을 (이타적 욕구로) ‘전환’하는 문제이다. 일상의 생활을 영유해야 하는 일반인들은 욕심을 조절한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정당한 욕구라면 그대로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기적 욕심은 어디까지나 자기 위주이지만, 개인을 확장하여 가정이나 직장을 위해 나아가 더 큰 가치실현을 위한 이타적 욕구로 전환한다면, 작은 욕구들은 스스로 잠잠해지고 만다. 물론 모든 이기적 욕심에는 ‘분별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이타적 욕구가 발현된다.

 

이타적 욕구는 가깝게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대승불교의 보살이 세운 서원(誓願)도 이에 해당한다. ‘욕심을 버릴 것이 아니라 더 키우라’는 말이 있다. 더 큰 가치를 위한 이타적 목적에 동기부여가 된다면 더 이상 자질구레한 이기적 욕심이 설 자리는 없게 되고, 오히려 이전의 이기적 욕심은 이타적 목적을 위한 중요한 실천동력이 된다.

 

 

 

습관의 병

 

의(意)는 ‘의지’이고, ‘뜻’이다. 뜻은 마음이 움직여서 가는 곳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뜻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가고, 몸이 가는 곳에 어느새 길이 나게 되어 그렇게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고 인생의 방향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의지는 습관과 행동의 변화는 물론 세상과의 변화에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흔히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몸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인간의 기본 생존을 위한 생리적 현상을 제외하더라도 대부분 심신작용을 오래 반복하게 되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자동적으로’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된다.

 

어떤 습관이라도 한 번에 생기는 경우는 없다. 모든 행동은 반복을 통해 학습되고 그것이 마음과 몸에 일정한 경향성으로 굳어지게 된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의도와 상관없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듯이 한번 습관이 들면 쉽게 고치기 힘들다. 이미 몸과 마음에 습관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부당한 행동을 한다면, 이 또한 마음병에 해당한다. 우리의 행동도 습관도 그 마음의 의지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반대로 우리의 의지에 따라 다시 변할 수 있다.

 

습관의 병을 다스리는 데도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는 악한 의도와 악한 습관을 제거하는 것이며, 둘째는 선한 의도로 선한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다. 계(戒) 공부는 행동의 문제, 즉 악습을 제거하고 악행을 범하지 않도록 한다. 하지만 계는 정(定)과 혜(慧)를 닦기 위한 예비적 수행으로 간주되곤 하였다. 그러나 정당한 실행의 문제는 결코 소홀히 다뤄져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는 취사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선행이든 악행이든 24시간 심신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행위 과정은 다시 쌓여 습관이 되고 업력이 되어 그 인생에 있어서 선악업보의 차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악한 행동을 다시 하지 않도록 계를 철저히 지켜 악한 의도와 잘못된 습관을 제거함과 동시에, 실행을 해야 할 때는 정당한 의지(뜻)를 세워 올바른 행동을 실천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 묵은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을 개척해갈 수 있다.

 

이처럼 의지적 측면에서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데는 단순히 이기적 욕심에 의한 부당한 습관(행동)을 끊는 소극적 방법만이 아니라 이타적 목적에 대해 새롭게 동기부여를 함으로써 정당한 행동, 이타적 행동을 실천하는 적극적 방법도 반드시 필요하다.

 

소태산 대종사는 특히 작업취사의 실행 공부를 강조하여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데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에 돌아갈 뿐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나니, 우리 인류가 선(善)이 좋은 줄은 알되 선을 행하지 못하며, 악이 그른 줄은 알되 악을 끊지 못하여 평탄한 낙원을 버리고 험악한 고해로 들어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에 당하여 시비를 몰라서 실행이 없거나, 설사 안다 할지라도 불 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리거나하여 악은 버리고 선을 취하는 실행이 없는 까닭”(《정전》작업취사 중)이라고 하였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스스로 큰 꿈을 꾸어 보자.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더 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인생의 목적을 새롭게 세워보자. 그리고 이타적 목적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통해 이기적 욕심은 단호히 끊고 오랜 습관에 찌든 생활에서도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 가는 주인공이 되자.

 

장진영(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HK교수)

 

http://www.wk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1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