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활동
[원대신문-기고] 마음공부 필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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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인문학연구소2015-05-31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이메일 프린트 |
[특별기획] 마음 공부 필요
비대한 마음을 경쾌하게 뻣뻣한 마음을 유연하게
우리대학 ‘마음인문학연구소’의 연구 성과를 대중과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연구소 소속 연구교수들의 글을 연재한다. 인간의 존엄성, 마음, 감성 등에 대한 글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찰해 보는 기회를 가지길 바란다. / 편집자
마음이 아파요
어찌 보면 길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찰나의 순간일 수도 있는 우리 인간의 삶. 오늘 이 순간에도 참 많은 사연과 이유, 핑계, 원인으로 슬프고, 짜증나고, 괴로운 사건들이 한 둘이 아니다.
노모가 건강하지 못해서 불안하고, 잘 살지 못하는 자식이 늘 마음에 걸리고, 앞길이 구만리인 고3 아이가 공부 대신 게임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엄마가 맨날 공부만 하라고 하니 자식은 맨날 볼멘소리하고, 남편이 매일 늦게까지 술만 먹고 다니니 아내는 괴롭고, 지속적으로 징징대는 아내의 잔소리에 남편은 두 손 모두 들 지경이고, 아파트 위층 집이 시끄러워 기회만 엿보면서 충돌을 예상하고, 직장 동료의 아부하는 행동거지가 영 마음에 거슬려 사표를 만지작거리고, 게다가 집나간 멍멍이까지 들어오질 않고, 세상조차 내 맘대로 돌아가질 않으니 모든 게 갑갑할 뿐이다.
이 사건과 사건들 사이에서는 외적으로는 각종 명령, 지시, 의무, 소망, 서두름 등이 전쟁하듯 난무하고 부딪치고 부서지고, 내적으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와 절망의 감정들이 용광로처럼 들끓는 가운데, 삶은 어느새 지옥으로 변해가고 심신은 점차 쇠약해져만 간다.
렛잇비
현재 삶을 고통과 괴로움으로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비틀즈의 <렛잇비>(Let it be)에 한번 귀 기울여 봄직도 하다. 비틀즈는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내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내가 알게 되었을 때 / 엄마는 내게 다가와 / 지혜의 말씀을 해주셨지/ 순리에 맡기렴/ 내가 어둠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즈음/ 엄마는 바로 내 앞으로 다가와/ 지혜의 말씀을 해주셨지/ 순리에 맡기렴 […]/ 그리고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 본 세인들은 다들 동의하지/ 잘 될 거야 / 순리에 맡기렴/ 헤어져도 재회의 기회는 여전히 있는 법/ 잘 될 거야/ 순리에 맡기렴/ […] 그리고 밤하늘에 구름이 끼어도/ 빛은 여전히 있어 가지고 / 내게 광명을 줄 것이고/ 그 빛은 앞으로도 꾸준히 발할 거야/ 순리에 맡기렴/ 음악소리에 내가 잠을 깼을 때/ 엄마는 내게 다가와/ 지혜의 말씀을 해주셨지 / 순리에 맡기렴 […]
자식이 힘들 때 엄마가 들려준다는 지혜의 속삭임, 아니 비틀즈가 당신에게 들려주는 지혜의 속삭임, 렛잇비. 어떤가? 힘들고 지쳐 있는 당신에게 위안이 되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적어도 몇몇 이론적 근거에서 그런 것으로 보여진다.
고통의 원인과 렛잇비의 의미
힘들 때, 괴로울 때, 순리에 맡기거나 순리를 따르라고, 그러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노라고 비틀즈는 노래한다. 그런데 고통 혹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이기에 렛잇비가 그에 대한 묘약이라는 걸까?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경로로 괴로움을 겪는 것일까? 이에는 우선 세 가지 타입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러저러하게 해주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이 물거품이 될 때, 내가 가령 친구를 속여 이득을 취하고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게 모두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에 부합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괴로워 한다. 즉 욕구, 이상/가치 그리고 실제/현실 간에 눈에 띄는 불협화음이 존재할 때, 혹은 욕구와 실제 간, 욕구와 이상적/윤리적 가치(양심) 간 그리고 이상과 현실 간에 간과할 수 없는 불협화음이 존재할 때,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다만 상기한 불협화음들이 모든 이들에게 같은 정도로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사람 각자가 욕구, 이상, 현실 각각을 선호하는 정도는 제각각인데, 욕구 측면을 중시하는 성향의 프로이트형 심리주의자들은 현실이 자신의 욕구에 따라주지 않거나 혹은 이상(양심)이 자신의 욕구를 억압해 올 때 괴로움을 느끼는 경향이 있고, 진·선·미·성의 이상적 가치를 중시하는 플라톤형 이상주의자들은 현실이 자신의 이상에 잘 부합하지 않거나 사적인 욕구에 휘둘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가치를 제대로 관철시키지 못할 때 괴로워하는 경향이 있으며, 실제/현실 지향적 삶을 사는 스토아형 현실주의자들은 실제가 개인의 심리에 좌지우지되어 왜곡되거나, 이상이 현실을 압도할 때 괴로움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렛잇비는 사람이 추구하는 욕구, 이상 그리고 현실/실제 간에 궁극적으로 그 어떤 불협화음을 만들어내지 않는 방향의 삶을 권장하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이 선상에서 사람들은 욕구를 줄이거나, 현실지향적으로 이상을 세우거나, 현실을 욕구 및 이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재건하는 시도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렛잇비가 이러한 의미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욕구, 이상, 실제 간의 불협화음이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의 욕구, 개인적 이상 그리고 개인의 사적인 생각에 비춰진 현실 간에 존재하는 불협화음, 즉 실제계가 아닌 관념계 내에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라면, 렛잇비는 마음이 내적으로 정합적일 수 있게끔 재정비하라는 말로 읽힐 수도 있다. 가령 지나친 욕구나 이상을 줄이거나, 현실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수정하거나, 편향적인 생각이나 태도를 바로잡으라는 식의 조언으로 읽힐 수도 있다.
렛잇비의 의미가 이것으로 족히 파악된 것일까?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 위의 얘기에서는 마음작용의 형체가 선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제반 괴로움이 선명한 마음작용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고 그리고 괴로움은 마음작용의 양태를 수정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마음의 형체가 약화되거나 흐릿해진다면, 즉 탈실체화될 수 있다면, 상황은 어떨까? 이를 통해 고통이 혹시 한 방에 사라질 수 있지는 않을까? 불교를 비롯한 동양 전통의 마음수양실천에서도 선호되고 있는 이러한 마음의 탈실체화가 렛잇비의 마지막 의미를 장식할 수 있다. 고통이나 괴로움은 사실 종종 실체화된 마음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이 왜 실체화되는 경향을 갖는 걸까? 답은 마음의 지향적 특성(Intentionality)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음 자체는 관념으로서 실체가 없지만, 그것이 특정의 대상이나 사실, 이미지 등을 지향하면서 실체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마음은 딱딱하거나, 경직되거나, 강하거나, 곧거나, 질긴 습성을 갖게 되고 그리고 이로부터 집착심이 나와 고통과 괴로움을 만들어낸다. 괴로움을 더는 데는 그래서 마음의 ‘재질’을 약화시키거나, 유연화시키거나, 묽게 풀어 헤치거나, 무화시키거나, 가볍게 하는 등의 ‘마음의 탈실체화’라는 마음다이어트법이 필요하다.
마음다이어트는 다양한 형태로 실천될 수 있다. 가령 생각 속에서 사물을 보는 대신 내 생각과 마음을 굽어보면서, 생각은 생각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자각, 세상이 내 마음 같지가 않으니 안달할 필요 없고 그래서 또한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여여한 태도 취하기 그리고 이 선상에서 절대주의적, 의무론적, 명령형의 사고와 태도 대신 조건적, 상대주의적, 가설적 생각과 태도 취하기, 세상과 대적하는 부정과 회피, 거부의 태도보다는 세상을 받아들여 그것과 하나가 되는 긍정과 수용의 개방적 사고와 태도 취하기의 형식으로 실천될 수 있다. 이런 마음다이어트법을 통해 무겁고 경직되었던 마음이 가볍고 유연해져 세계친화적인 마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렛잇비는 마음을 자유롭게 방생시켜 자유롭게 비상하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벳 미들러의 “멀리서”
상기한 성질의 렛잇비는 벳 미들러(Bette Midler)가 노래한 <멀리서>(From a Distance)에서 표현된 바 있다. 노래의 가사에 한번 귀 기울여 보자.
멀리서 보면/ 세상은 파랗고 초록색으로 보이지/ 그리고 눈 덮인 산들은 하얗게 보이고/ 멀리서 보면/ 바다는 강줄기와 연접해 있고/ 그리고 독수리는 하늘을 날지/ 멀리서 보면/ 모든 것들이 조화롭고/ 조화는 온 천지에 울려퍼지지/ 그것은 희망의 소리이자/ 평화의 소리이며 / 모든 이들의 소리이기도 하지/ 멀리서 보면/ 우리는 족히 가지고 있고/ 그리고 궁핍하지도 않고/ 그리고 총도 없고/ 폭탄도 없고, 질병도 없고/ 기아도 없지/ 멀리서 보면/ 우리는 같은 길을 행진해가며 다양한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지/ 희망가를 연주하고/ 태평가를 연주하고/ 그곳에는 모든 이들의 노래가 있지/ 신은 우리를 보고 있어 / 신은 우리를 보고 있어 / 멀리서 신이 우리를 보고 있어/ 멀리서 보면/ 당신은 내 친구처럼 보이지/ 비록 우리가 전쟁상태에 있더라도 말이야/ 멀리서 보면 /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어/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지를/ 멀리서 보면/ 화합이 보이지/ 그리고 그것은 온 천지에 울려 퍼지지/ 그리고 그것은 희망의 희망이고/ 사랑의 사랑이고/ 모든 이들의 마음이지/ 그리고 신이 우리를 보고 있어/ 신이 우리를 보고 있어/ 신이 우리를 보고 있어/ 멀리서/ 오, 신이 우리를 보고 있어/ 신이 우리를 보고 있어/ 신이 우리를 보고 있어/ 멀리서.
비틀즈가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는 의미에서 렛잇비를 노래했다면, 벳 미들러는 여기서 그 이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음 놓아주기’의 의미에서의 렛잇비를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렛잇비의 작용과 반작용의 양 측면을 각각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렛잇비 삶을 향하여
비대하고 뻣뻣한 마음에서 괴로움은 생겨난다. 그래서 심란한 일이 있으면 곧장 내 마음이 비대하거나 뻣뻣하게 굳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마음다이어트, 즉 마음공부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비대한 마음을 경쾌하게 만들고 그리고 뻣뻣한 마음을 유연하게 그리고 새롭게 만드는 작업이다. 에픽테투스가 『엥케이리디온』에서 제시하는 마음공부 방법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오 제우스 신이여, 운명의 신이시여, 당신이 나를 이끄소서, 당신이 나에게 정해주신 그 어느 곳이라도 가도록. 나는 주저 없이 따르겠나이다” 고대인 에픽테투스도 우리에게 렛잇비 스타일의 삶을 권장하고 있다.
이기흥 교수 (마음인문학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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